김명심 만학도···섬마을 귀한 딸에서 1종 설비기사, 칠순의 나이로 한양대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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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9.0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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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명심씨 ‘환경문화대상’수상 기념 사진
 
 
 
― 건설 난방설비 현장을 누비며 독학으로 1종 기사 자격 취득, IMF 외환위기 도 성실과 땀으로 극복
 
― 칠순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해 배움의 열정을 이어가며 현재 재경 신안군 여성회 감사로 봉사 이어가
 
― 섬마을 귀한 딸에서 1종 설비기사로, 칠순의 한양대 늦깎이 대학생으로, 중랑구 봉사자 김명심 씨가 걸어온 성실과 배움의 40년 여정
 
 
〔인물 인터뷰〕
 
서울 중랑구 골목길을 걷다 보면 단정한 옷차림에 온화한 미소로 이웃에게 인사를 건네는 김명심(70) 씨를 만날 수 있다. 전남 신안의 섬마을에서 자라 서울로 상경해 난방 설비업 1종 기사로 현장을 누비고, 칠순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해 만학의 꿈을 펼치며 지역사회 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김명심 씨를 만나 그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전남 신안 섬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목포로 유학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
 
전남 신안군 도초면 이곡리에서 7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 다섯 밑에 태어난 귀한 딸이라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시고 주역을 공부하셨을 만큼 학식과 혜안이 깊은 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어린 내 손을 잡고 나룻배를 타며 목포 시내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그때는 왜 그렇게 나를 데리고 다니시는지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어린 딸에게 큰 세상을 보여주고 당당한 교육자로 키우고 싶으셨던 아버지의 깊은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Q. 학창시절 이후 서울로 상경해 가정을 꾸리기까지의 과정은 어떠했는가?
 
목포여중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전통 있는 목포여고로 진학하길 바라셨지만, 친구들을 따라 목포여상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아버지께 꾸중도 들었지만, 그때 배운 상업과 부기 실무가 평생의 자산이 됐다.
 
졸업 후 서울 봉천동에 살던 오빠를 따라 상경해 태흥무역 경리과에 입사했다. 회사 계열사 직원의 소개로 현대건설 계열에 다니던 성실한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남편이 난방설비 시공업으로 독립하면서 40년 건설 설비업의 길을 함께 걷게 됐다.
 
 
Q. 건설 난방 설비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1종 기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며 큰 활약을 펼쳤는데, 사업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88올림픽 전후로 주택 개·보수 공사가 폭주했다. 나는 사무실에만 머물지 않고 찾아오는 고객들을 직접 맞이했다.
 
설비공사를 의뢰하러 오는 분들은 대부분 주부들이었다. 남성 기술자들이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보일러 원리나 시공과정을 주부의 눈높이에 맞춰 조곤조곤 설명해 주니 신뢰를 많이 받았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수백 명의 전화번호와 목소리를 다 외워 반갑게 응대했고, 하자가 생기면 두말없이 달려가 끝까지 책임졌다. 일감이 늘어나자 1994년 독학으로 열관리 시공협회 시험을 치러 자격증을 취득했고, 업체를 난방 시공업 1종으로 승격시켰다.
 
돌이켜보면 특별한 비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객에게 정직하게 설명하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Q. 40년 사업을 이어오며 가장 힘들었던 위기의 순간은 언제였고, 어떻게 극복했는가?
 
1996년 중랑구 묵동에 지하 1층, 지상 6층 건물을 신축했는데 이듬해 말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공사는 끊기고 전세보증금 반환 압박까지 겹치면서 부도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가족들 밥을 챙겨놓고 청량리 인근 학원 식당에 나가 하루 12시간씩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동안 억척스럽게 생활비를 벌어가며 버텼다. 그렇게 위기를 넘긴 덕분에 2013년에는 210세대 노후 연립주택 단지의 배관 개·보수공사와 보일러 교체공사를 맡게 됐다.
 
부부가 함께 발로 뛰며 성실하게 견적을 내자 주민들이 믿고 맡겨줬다. 지하 창고에 책상 하나를 놓고 홀로 공정을 조율하면서 서울시 동부사업소 보조금 서류까지 도맡아 처리했다. 그해에는 사업을 시작한 이후 최대 매출을 달성하는 성과도 거뒀다. 힘든 순간마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결국 위기를 이겨내는 힘이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Q.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오랜 기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어떤 활동들을 해 왔는가?
 
1993년 묵동으로 이사 온 뒤 이웃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봉사를 시작했다.방범지도위원회, 자유총연맹, 중랑구 환경감시단, 재향군인회 여성회장 등 여러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홀몸 어르신 식사 대접, 김장 나눔, 골목길 청소 등을 도맡았다.
 
꼼꼼한 행정력을 인정받아 중화1구역 재개발정비사업조합 추진위원회 감사와 조합이사를 12여 년간 맡아 사업이 투명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웃을 위해 꾸준히 봉사한 공로로 국회의원 표창과 중랑구청장 표창, 환경봉사 우수상 등을 받았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따뜻한 밥 한 끼를 드시고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Q. 재경 신안군 도초면 향우회 제12대 여성회장을 맡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고향을 향한 마음은 한시도 잊지 않았다. 2015년부터 2016년까지 2년간 재경 신안군 도초면 향우회 제12대 여성회장을 맡아 고향 도초와 향우들을 위해 봉사했다.
 
회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향우회 어르신들을 위한 각종 나눔과 봉사활동을 비롯해 회원 간 화합과 소통을 위해 힘썼다. 고향 발전을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임기 중 보여준 봉사 정신과 고향 사랑을 인정받아 당시 신안군수였던 고길호 군수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재경 신안군 여성회 감사로 활동하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회의 운영과 사업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살피고 있다.
 
 
Q. 재경 신안군 도초면 제12대 여성회장으로 활동했던 당시를 돌이켜 보면 어떠한가?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2015년 처음 회장직을 맡았을 때의 설렘과 책임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재경 향우회 어르신들과 회원들을 섬기고 이끄는 자리가 쉽지만은 않았지만 ‘고향 도초’라는 이름 하나로 뭉친 친구와 후배 회원들이 곁에서 든든하게 힘이 되어줬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서 가장 보람차고 뜨겁게 봉사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Q. 임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이나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인가?
 
향우회 어르신들을 위해 친구와 후배 회원들과 손수 음식을 준비하고 따뜻한 정을 나눴던 나눔 행사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작은 정성이지만 어르신들이 환하게 웃으시며 손을 잡아주실 때 봉사의 참된 기쁨을 느꼈다.
 
또한 고향 도초면의 발전을 위해 향우들과 고향 방문 봉사를 기획했을 때도 큰 자부심을 느꼈다. 타향에서 생활하는 향우들이 함께 고향을 찾고 고향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는 모습이 참으로 뜻깊었다.
 
 
Q. 여성회장으로 단체를 이끌며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무엇인가?
 
회합과 소통이었다. 재경향우회가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가족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바랐다.
 
특히 젊은 회원들과 여성 회원들이 편하게 참여할 수 있는 따뜻하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드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외되지 않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향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Q. 임기 중 봉사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안군수 표창장을 받았다.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사실 어떠한 대가나 칭찬을 바라고 시작한 봉사가 아니었기에 표창장을 받았을 때 송구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컸다. 그 상은 나 개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고향 발전과 향우회 화합을 위해 함께 땀 흘려준 제12대 여성회 회원 모두에게 준 상이라고 생각한다.
 
신안군수 표창을 계기로 고향 신안군 도초를 위해 더욱 진정성 있게 봉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Q. 현재 재경 신안군 여성회 감사로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면 단위 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는 신안군 전체 여성회 감사를 맡아 여성회의 살림과 사업들이 공정하고 따뜻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살피고 있다.재경 신안군 여성회가 향우 사회의 따뜻한 어머니이자 자매 같은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있다.
 
앞으로도 감사로서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회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여성회가 더욱 화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Q. 앞으로의 다짐과 함께 향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몸은 비록 타향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섬바람이 불어오는 고향 도초와 신안에 있다. 앞으로도 재경 신안군 여성회 감사로서, 그리고 도초의 딸로서 향우 간의 우의를 다지고 고향 발전에 이바지하는 봉사자의 길을 걸어가겠다.
 
그동안 믿고 따라준 도초면 향우 여러분과 신안군 여성회 식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Q. 칠순의 나이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해 만학도로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늦은 나이에 대학 진학을 결심한 계기와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가?
 
사회활동을 넓혀가면서 더 깊이 배워야 이웃과 사회에 더 바르게 기여할 수 있다는 갈증이 컸다. 고향 향우회 소식을 통해 한양대 과정을 알게 됐고, 망설임 없이 도전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아들과 며느리가 “엄마가 정말 자랑스럽다”며 응원해줬다.
 
첫 강의 때 교수님이 꿈을 물었을 때 “열심히 배워서 남은 생애를 이웃과 사회를 위해 올바르게 봉사하는 데 바치겠다”고 답했고, 큰 박수를 받았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대학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앞으로 배운 것을 사회에 다시 나누고 싶다.
 
 
Q. 마지막으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나를 지탱해 준 힘은 어린 시절 큰 세상을 꿈꾸게 해주셨던 아버지의 사랑,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한 노동의 가치, 그리고 늘 곁을 지켜준 가족이었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고 나눔에는 나이의 한계가 없다.
 
70세에 시작된 배움의 열정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지식과 온기를 이웃에게 전하며 세상을 밝히는 봉사자로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
 
 
 
〔글·인터뷰=정선모 문화부장〕
 
 
 
〔mailnews7114@gmail.com〕
 
 
 
■ 김명심 주요 이력
 
◉ 경력 : 재경 신안군 도초면 향우회 제12대 여성회장, 2015년~2016년(2년)
 
◉ 수상 : 신안군수 고길호 표창장,(재경 신안군 도초면 향우회 여성회장 임기 중 봉사 공로), 2014년 나진구 중랑구청장 표창장, 2023년 현, 류경기 중랑구청장 표창장, 2024년, 박홍근 국회의원 표창장
 
◉ 주요 봉사활동 : 방범지도위원회, 자유총연맹, 중랑구 환경감시단, 재향군인회 여성회장 등 지역사회 봉사
 
◉ 현재 직책 : 재경 신안군 여성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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